Remarkable 2 리뷰
올해 초, 우연히 전자잉크 태블릿인 Remarkable 2 의 소개 영상 을 보게 되었습니다. 간단하지만 분명한 목표 (‘종이’와 같은 사용경험) 에 집중한 디자인과 기능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망설이다 7월에 한번 더 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선주문 기간인데다 팬데믹 등의 영향으로 11월에야 배송된다고 하더군요. 한달 내로는 무료 반품도 된다길래 고민할 시간은 많으니 일단 지르고 고민해 보자는 생각으로 질렀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지난 월요일에 마침내 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구매해 본 전자잉크 기기인데, 이제 겨우 일주일 됐지만 제법 만족스럽게 사용 중입니다. 사용 경험을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화면
예전에 논문이나 전자책을 읽을 요량으로 크롬북을 구매 했죠. 12.3인치 크기에 2400x1600 해상도라 책과 논문을 읽기에도 괜찮은 경험이었지만 진짜 종이를 보는 느낌은 확연히 아니었습니다. 특히 침대에서 보기에는 확실히 눈이 조금 피로하더군요. 비행기나 버스와 같이 종이책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척 유용했지만 여건이 되는 상황에서는 종이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리마커블 2는 10.3인치 전자잉크 화면입니다. 다른 전자잉크 기기를 많이 사용해 보지 않아 비교를 하긴 어렵지만 기대했던 대로 정말 종이를 보는 듯한 경험입니다. 확실히 눈이 편안합니다.
회색 바탕이고 명암이 강한 편은 아니라 새하얀 종이책에 비교하면 화면이 어두운 느낌도 듭니다. 한밤에 어두운 조명에서 작은 글씨를 읽기는 조금 불편합니다. 형광등 아래에서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10.3인치 화면은 논문이나 일부 전공 서적을 보기엔 좀 작은 느낌도 듭니다만 전자잉크라 눈이 피로해지지 않고, 그래서인지 내용이 제법 눈에 들어옵니다. 소프트웨어에서 pdf 의 불필요 여백을 자동으로 제거해주고 사용자가 직접 여백 조정을 할 수 있어서 더욱 편합니다.
이동성
크롬북을 전자책 리더로 쓰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가 이동성입니다. 랩톱에 비하면 많이 가볍지만 최신 태블릿이랑 비교하면 여전히 조금 무거워서 독서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조금 불편했습니다.
리마커블2의 두께는 4.7mm, 무게는 403.5g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얇고 가벼운 태블릿이라고 홍보하는데요. 얇은 두께는 그립감에는 나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만, 가방에 넣거나 할 때엔 큰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책상 위에 놓을 때에도 a4 종이 뭉치 정도 느낌밖에 안들어 부담이 없고 미관을 해치지 않아 좋습니다. 무게는 가볍긴 하지만 한손으로 들고 장시간 독서를 하기엔 손목에 조금 무리가 왔습니다. 양손으로 들면 거의 부담이 없습니다.
배터리
이북 리더에 자꾸 눈이 갔던 이유 중 하나가 배터리입니다. 월요일에 받은 후 한번 충전하고 이후 일부러 충전 없이 사용 중인데요, 현재 배터리 잔량이 57%군요. 충전 속도는 조금 느린 편입니다. 랩톱에 연결해 충전했을 때 대략 50% 에서 100% 까지 충전하는데 몇시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필기감
책은 깨끗이 보자는 주의라 태블릿들의 필기 능력에 대한 홍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왔습니다. 여러 기능을 가진 필기 어플을 태블릿들이 광고하지만 그 어플을 켜는 것도 귀찮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유리화면에 미끄러지는 필기감과 약간씩 있는 레이턴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항상 a4 이면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필기하는게 제 최고 선택이었습니다. 거친 질감의 반투명 필터를 화면에 씌워 필기감을 살리는 대안도 봤지만 화면이 흐려지는 게 영 맘에 안들고 필기감도 너무 거칠거려서 별로더군요.
리마커블2 역시 필기 기능을 제공합니다만 기존 선입견 때문에 제게는 크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기를 받으면 어디까지나 리더로만 사용할 생각이었고, 나는 쓰지도 않을 필기 기능에 돈을 쓰는 거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죠. 하지만 막상 기기를 받은 후 사용해 보니 생각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뒤에 소프트웨어 섹션에서 한번 더 설명하겠지만 인터페이스가 무척 간단하면서 편리해서 필기 기능을 켜기가 간단합니다. 꼭 필기 앱을 켜지 않더라도 읽는 중인 책 위에 끄적거린 후 메모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책을 깨끗이 유지하면서 메모할 수 있는 거죠. 이 기능은 다른 태블릿들도 많이 제공할 지 모르겠지만 제겐 중요한 기능입니다.
펜을 자석식으로 붙여두는 것도 제겐 큰 장점입니다. 갤럭시와 같이 기기 내에 끼워두는 형태가 안전하긴 하지만 넣었다 꺼냈다 하기가 제겐 꽤 귀찮았거든요. 펜이 항상 태블릿 측면에 붙어 있으니 그냥 집어들어 필기하면 되기 때문에 무척 편리합니다.
필기하는 느낌도 종이에 필기하는 맛과 무척 유사합니다. 모나미의 볼이 굴러가는 필기감을 선호하는 제게는 여전히 조금 거친 필기감이긴 하지만 허용범위 내입니다. 레이턴시가 조금 있기는 한데 빠른 속도로 사인을 하거나 할 때에나 느껴지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단계에선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또한, 저는 글씨를 작게 쓰는 편인데 기존의 다른 태블릿에서는 글씨를 작게 쓰면 보기도 불편하고 필기하는 느낌도 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리마커블2에서는 작은 글씨를 쓰는 것도 간단하고 가독성도 괜찮은 편입니다. 실제로 평소에 노트에 하는 필기와 크기를 비교해 봐도 손색 없습니다.
소프트웨어
리마커블2의 기능은 무척 간단합니다. 어떤 경쟁 태블릿은 안드로이드 기반이라 수많은 안드로이드 앱도 돌릴 수 있고 웹브라우징도 할 수 있는데 리마커블2는 pdf 또는 E-book 파일의 읽기와 필기 기능, 그걸로 끝입니다. 썰렁한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곳에 정신이 분산되지 않고 리마커블2를 꺼내들었을 때 하려던 원래 목적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인터페이스는 간단하다 못해 투박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기능은 모두 있습니다. 간단한 하나의 목표를 완벽하게 구현하자는 유닉스 정신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패스워드가 적용된 pdf 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하며 (시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pdf 내의 링크 기능 역시 지원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특정 섹션 또는 페이지로의 이동 기능은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pdf 여백을 자동으로 잘라내서 보여주며 사용자가 직접 이 여백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자동으로 잘라주는 기능이 제법 괜찮아서 저는 직접 여백을 조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논문 등의 글이 많은 문서를 읽기에도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리마커블2는 리눅스 기반의 운영체제를 사용합니다. 제가 구매를 결정하는데 큰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ssh 접속도 가능합니다. 4.14 버전 커널을 사용하는군요.
$ ssh root@10.11.99.1
root@10.11.99.1's password:
reMarkable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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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arkable: ~/ uname -r
4.14.78
reMarkable: ~/
파일 전송 및 클라우드 동기화
리마커블2에 파일을 전송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USB 연결입니다. 랩톱 등의 컴퓨터와 USB 를 통해 연결하면 웹 인터페이스를 통해 리마커블2와 pdf 파일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웹 인터페이스가 디렉토리 기능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습니다. 컴퓨터에서 리마커블2로의 파일 전송은 루트 디렉토리로만 전송되며, 따라서 디렉토리별로 파일을 정리하려면 기기에서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리마커블에서 별도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8GB 공간이 제공되어, 기기에 인터넷이 연결되면 자동으로 모든 파일이 동기화 백업 됩니다. 여타 클라우드 서비스와의 동기화는 되지 않습니다.
리마커블2 외의 기기에서 이 클라우드 서비스에 접근하기 위해선 앱을 설치해야 합니다. 데스크탑, 안드로이드, iOS 용 앱이 있는데 데스크탑 앱은 윈도우용입니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와인 등을 이용해 리눅스에서도 돌릴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Read on reMarkable 이라는 크롬 익스텐션이 이 아쉬움들을 제법 해소해 줍니다. 버튼을 하나 누름으로써 인터넷 사이트의 내용 또는 pdf 를 바로 리마커블2에 보낼 수 있습니다.
가격
리마커블2의 가격은 399달러입니다. 제가 주문할 때엔 선주문 단계라 펜과 Folio 를 이 가격에 포함해 줬는데 지금은 별도 가격을 받는군요. 같은 구성으로 하면 총 517달러입니다. Folio 를 제하면 448달러. 아슬아슬하게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합니다.
총평
가히 궁극의 종이 대체제가 될 수 있는 기기라고 평하겠습니다. 필기와 pdf / epub 파일 읽기라는 최소한의 목적에 맞추어 깔끔하게 만들어진 기기입니다. 목적이 일치한다면 돈값을 할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웹브라우징도 되고 앱도 설치/구동되는 범용 태블릿을 원한다면 다른 기기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